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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무라 요시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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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무라 요시아키는 1569년에 태어난 일본의 다이묘로, 기독교 신자였으나 1602년에 닛렌 종으로 개종했다.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에 참여했으며, 임진왜란에도 참전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가담했으며, 이후 기독교를 탄압했다. 1607년에는 가문의 재정 확보를 위해 일족의 영지를 몰수했고, 1616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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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무라 요시아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오무라 요시아키
한자 표기大村 喜前/嘉前
이명가젠
영명돈 산초
출생에이로쿠 12년 (1569년)
사망겐나 2년 8월 8일 (1616년9월 18일)
묘소나가사키현오무라시의 혼쿄지
관위
관위종5위하 단고노카미
주군
섬긴 주군도요토미 히데요시
히데요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
가문
씨족오무라 씨
가족 관계
아버지오무라 스미타다
어머니사이고 스미히사의 딸 오엔
배우자아리마 요시즈미의 딸
자녀스미요리
마쓰라 다카노부 계실
오무라 기미요리 실
신타로
후쿠다 가네노리 실
오무라 스미시게 실
오무라 도시타케 실
경력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초기
막부에도 막부
봉록히젠오무라 번주 (大村藩主)
재임 기간1587년 - 1615년
선대 영주오무라 스미타다
후대 영주오무라 스미요리
기타
영명 (세례명)돈 산초 (Don Sancho)
계명겐오인 젠준 닛쇼 다이코지 (顕往院善潤日照大居士)

2. 생애

1569년 키리시탄 대명(大名) 오무라 스미타다의 아들로 태어났다.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규슈 정벌 때 아버지 대신 참전하여 영지를 인정받고, 그해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독을 상속받았다. 임진왜란에 참전하였으며, 1599년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 히데요시 사후 구시마성을 축성하고 거성을 옮겼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가담하여 승리 후 영지를 보전받았다. 1602년 기독교에서 닛렌 종으로 개종하고 기독교를 탄압하였다. 1607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허락을 받아 일족의 영지를 몰수했다. 오사카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측으로 참전하여 나가사키 경비 등을 담당했다. 1615년 아들 스미요리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1616년 사망했다.

2. 1. 가독 상속과 규슈 정벌

1587년 3월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규슈 정벌 때 병상의 아버지 오무라 스미타다를 대신하여 19세의 요시아키가 히데요시 휘하에 참전(代参陣)하여 5월 초 태평사(泰平寺)(가고시마현 가와내시)에서 대면하여 구령 안도의 홍인장을 받았다. 같은 해 5월 18일[2]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독(家督)을 계승했다. 같은 해, 마쓰우라 시게노부의 적자 히사노부에게 여동생 마쓰토인을 시집보내 화장령(化粧領)으로 영지를 분여했다.

2. 2. 임진왜란 참전

1592년 분로쿠·게이초의 역에 참전하여 평양까지 진출, 충주 전투와 순천성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3]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히젠(肥前)의 오무라 요시아키, 아리마 하루노부, 고토마 겐가가 신슈지마에 모여 거취를 논의했는데, 이들은 분로쿠·게이초의 역에서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 제1군으로 함께 싸운 사이였다. 요시아키의 의견이 채택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東軍)에 가담, 서군(西軍)에 속한 고니시의 남히고(南肥後) 국 영토 공격에 가신을 파견했다. 동군의 승리로 영지를 보전받았으나, 이후 전봉(転封) 논의는 취소되었다.

2. 3. 세키가하라 전투와 개종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마쓰우라 시게노부는 히젠(肥前)의 오무라 요시아키, 아리마 하루노부, 고토 겐가를 신슈지마에 모아 거취를 논의했다. 이들은 분로쿠·게이초의 역에서 고니시 유키나가 휘하에서 함께 싸운 사이였다. 요시아키의 의견이 채택되어 넷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東軍)에 가담했다. 요시아키는 서군(西軍)에 붙은 고니시의 남히고(南肥後) 국 영토를 공격하는 군에 가신을 파견했다. 동군이 승리하여 영지를 안도받았지만, 전후 전봉(転封) 이야기가 있었으나 취소되었다.[2]

요시아키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돈 산초(Don Sancho)라는 세례명을 가진 키리시탄이었으나,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발령한 「바테렌 추방령」을 받아 영내에서 선교사를 추방하고, 조선 출병 이후 영내에 금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그는 개인적인 신앙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히지 않았지만, 1600년 키리시탄이었던 부인이 사망했을 때 교회에 묘소를 만들었다.[4]

이후, 닛렌 종 신자였던 가토 기요마사의 권유, 나가사키 몰수 및 막부 직할화에 대한 의심, 일본인 사제 토마스 아라키의 참언 등 여러 이유로 1602년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버리고 닛렌 종으로 개종했다. 이후 기독교를 사교(邪教)로 규정하고 영내에서 엄격한 단속을 시작했다.[4] 영내 교회는 모두 파괴되었고, 여동생 마쓰토인과 스미요리는 이에 반대했지만 막부의 금교령 때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2. 4. 기독교 탄압

요시아키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돈 산초(Don Sancho)라는 세례명을 가진 키리시탄이었지만, 덴쇼 15년(1587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발령한 「바테렌 추방령」을 받아 영내에서 선교사를 추방하고, 조선 출병 이후 영내에 금제를 베풀고 있었다.[4] 요시아키는 개인적인 신앙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히지 않았지만, 게이초 5년 2월 19일(1600년)에 키리시탄이었던 부인이 사망했을 때 교회에 묘소를 만들었다.

그 후, 열광적인 닛렌 종 신자였던 히고의 대명 가토 기요마사의 권유, 나가사키가 몰수되어 막부 직할이 된 것이 주앙 로드리게스의 책략이 아닌가 하는 의심, 일본인 사제 토마스 아라키가 선교사는 외국 침략의 첨병이라는 참언을 한 것 등 여러가지 이유로 기독교를 혐오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게이초 7년(1602년), 요시아키는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버리고 닛렌 종으로 개종했다.[4]

이에 따라 『오무라가기』에서 사교(邪教)라고 명시된 기독교를 영내에서 몰아내기 위해 키리시탄에 대한 엄격한 단속을 시작했다.[4] 영내에 있던 교회는 모두 파괴되었다. 여동생 마쓰토인이나, 당시 키리시탄이었던 스미요리는 이에 반대했지만, 후에 막부의 금교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게이초 19년(1614년), 막부는 금교령을 내린 후 혼다 마사즈미를 오무라에 파견하여 현지 상황을 확인하게 했는데, 그때 요시아키는 사정에 밝은 자로서 설명 역할을 맡았다.[5]

덴쇼 소년 사절의 부사(副使)였던 치지이시 미겔은 요시아키의 사촌 형제였지만, 미겔이 기독교로 개종[6]한 후에도 박해를 가했다는 이야기가 예수회의 서간에 남아 있다. 그러나 박해를 가한 이유는 알 수 없고, 일본 측 사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7]

2. 5. 막부와의 관계

덴쇼 15년(1587년) 3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규슈 정벌 때 아버지 오무라 스미타다를 대신하여 히데요시에게 항복하고 영지를 인정받았다.[2] 같은 해 5월 18일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독을 상속받았다.

분로쿠 원년(1592년)부터 분로쿠·게이초의 역에 참전하여 평양까지 진출, 충주 전투와 순천성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게이초 4년(1599년)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3]

게이초 3년(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정정 불안에 대비하여 구시마성 축성을 시작, 다음 해인 게이초 4년(1599년) 거성을 산조성에서 구시마성으로 옮겼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마쓰우라 시게노부의 권유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東軍)에 가담했다. 서군(西軍)에 가담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를 공격하는 군에 가신을 파견하여 승리 후 영지를 보전받았다.

요시아키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세례명을 가진 키리시탄이었으나, 1587년 히데요시의 바테렌 추방령 이후 영내 선교사를 추방하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영내에 기독교 금지령을 내렸다. 1602년에는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버리고 닛렌 종으로 개종, 이후 기독교를 박해했다.[4]

게이초 12년(160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허락을 받아 재정 확보와 번주 권력 강화를 위해 일족의 영지를 몰수했다.

오사카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으로 참전하여 나가사키 경비와 도요토미씨 잔당 체포를 담당했다.

1614년, 에도 막부가 금교령을 내린 후, 혼다 마사즈미가 오무라에 파견되었을 때 요시아키는 현지 사정을 설명하는 역할을 맡았다.[5]

2. 6. 사망

게이초 19년(1614년), 막부는 금교령을 내린 후 혼다 마사즈미오무라에 파견하여 현지 상황을 확인시켰으며, 그때 요시아키는 사정통으로서 설명 역할을 맡았다.[5]

겐나 원년(1615년) 봄, 병을 이유로 가독을 적자 스미요리에게 양위했다. 겐나 2년(1616년) 8월 8일에 오무라에서 사망했다. 향년 48세. 혼케이지에 안장되었다. 박해를 원망한 기독교도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말도 있다.

덴쇼 소년 사절의 부사(副使)였던 치지이시 미겔은 사촌 형제였지만, 치지이시가 기교[6]한 후에도 박해를 가했다는 이야기가 예수회의 서간에 남아 있다. 그러나 박해를 가한 이유는 알 수 없고, 일본 측의 사료에서는 미상이다.[7]

3. 가계

아리마 하루노부와는 사촌 지간이다.

'''부모'''


  • 아버지: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
  • 어머니: 오엔(おえん) - 사이고 스미히사(西郷純久)의 딸


'''정실'''

  • 아리마 요시즈미(有馬義純)의 딸


'''자녀'''

  • 장남: 오무라 스미요리(大村純頼) (생모는 정실)
  • 오무라 신타로(大村新太郎)
  • 마츠우라 다카노부(松浦隆信)의 계실
  • 오무라 키미요리(大村公頼)[9]의 부인
  • 후쿠다 카네노리(福田兼則)[10]의 부인
  • 오무라 스미시게(大村純茂)[11]의 부인
  • 오무라 토시타케(大村敏武)의 부인

4. 구시마성

임진왜란에 참전했지만, 정유재란 순천성 전투(1598년)에서 기젠(喜前)을 포함한 소서행장, 마쓰우라 시게노부(松浦鎮信), 아리마 하루노부, 고토마 히로마사 등 일본군 5대 명장은 3배가 넘는 명·조선 연합군을 격퇴했다. 삼면이 바다에 접한 순천왜성을 참고하여 구시마성(玖島城)의 축성 장소가 선택되었다고 한다.[8]

참조

[1] 서적 A Companion to the Early Modern Catholic Global Missions https://books.google[...] BRILL
[2] 문서 4月とする説もある。
[3] 논문 羽柴氏下賜と豊臣姓下賜
[4] 문서 『フロイス日本史』によると、喜前のキリシタン弾圧はこの時にはじまった話ではなく、父の存命時代にも、龍造寺隆信の圧迫があったとはいえ、キリシタンへの弾圧行為が確認されている。
[5] 서적 護法賢聖伝二編 {{NDLDC|777907/41}} [...] 令知会
[6] 문서 1601年ごろイエズス会を退会、1606年ごろ喜前と同じ日蓮宗に改宗。
[7] 웹사이트 読売新聞九州こだわり歴史考・棄教の果て http://kyushu.yomiur[...]
[8] 간행물 大村市の文化財 大村市教育委員会 2012-03-19
[9] 문서 家老、元は渋江氏。
[10] 문서 元は独立勢力で、慶長3年(1698年)から大村家臣となった重臣福田(熊野)氏、福田兼親の子。兼親の室は純忠の娘。
[11] 문서 藩重臣の大村純勝の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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